'최고은법' 아시나요?…'철저한 지하경제' 문화예술계

김모씨(29)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2010년 2월 졸업했다. 영화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방송영상학을 전공했지만 방송국이나 영화사에 들어간 친구는 없다. 결국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고 싶은 일'을 병행하거나 전혀 관계없는 사무직이 된다. 정규직은 그렇게 '다른 일'을 하는 친구들 몇몇이 전부다.

김씨는 도무지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아는 교수님'의 영상물 제작을 도왔다. 8개월간 주말, 밤낮없이 일을 하고 수중에 쥔 돈은 프로젝트가 끝난 시점에서 건네 받은 600만원. 한 달에 '88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일을 시작할 때 계약은 커녕 "얼마를 지급하겠다'" 말도 없었다. 김씨는 그나마도 자신은 나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교수님이라 계약을 안한 것이고, 정확히 얼마를 받겠다고 챙기지 못한 것은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영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돈은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어디든 들어가서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맞는걸까.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김씨의 이런 끝 없는 고민은 대한민국에서 예술로 밥 벌어 먹고 사는 게 꿈인 이들이 누구나 갖고 있는 고민이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해서는 밥 벌어먹고 살지 못한다'라는 명제를 당연히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늘고 있다.

▲ 예술인들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설립을 준비중인 단체 소셜 유니온의 활동가 모집 포스터

◇문화예술계는 철저한 '지하 경제' 세계…청년들 불리한 '판'
문화기획 컨설팅업체 내용연구소의 김상윤 대표는 문화예술계를 '철저한 지하경제의 세계'라고 설명한다. 정규직은 거의 없고 불안정하기 그지 없는 고용 관계가 판을 친다.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것도 일반적이다. 이제는 말하기도 입아플 정도로 '굶어가며' 예술하는 친구들도 많다.

김 대표는 "제가 문화예술계 현실에 대해 강의를 하거나 논문을 쓸 때 인용할 통계자료 조차 없는 당혹스러움을 겪는다"며 "대부분이 비정규직에 계약서 조차 작성하지 않은 것이 관례로 일하는 환경이다 보니 얼마나 상황이 나쁜지 조사조차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술가들 스스로가 자신의 창작활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설문조사를 시도하더라도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비관하거나 무시하는 등의 태도를 취해 설문 회수율도 극히 낮다. 무엇보다도 문화예술계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연구하는 관심 자체가 없었다.

일견 자유와 개방성이 도드라지는 업계일 것 같지만 문화예술계 만큼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권위가 작동하는 곳도 없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몇몇 '갑'들이 새내기 예술가들을 착취하고 버리는 구조라는 것.

김노암 아트스페이스 휴 대표는 "예술가들은 원래 자기 착취를 동력으로 창작해내는 이들인데 타인에 의한 권력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며 "빈부격차가 점점 양극화 되는 곳도 이 곳"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김 대표는 "원래 있는 집 자녀들인 경우 그 돈을 '까먹으며' 실력을 키워가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청년들은 '무급이라도 좋으니 일하게 해주세요'라고 자기를 내 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시장경제체제의 부작용이 극도로 실현되고 있는 곳도 바로 문화예술계"라고 설명했다.

◇최고은도 지원 못받는 최고은법의 한계

예술인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예술인복지법'이 지난달 18일부터 시행됐다. 지난해 생활고와 병마로 죽은 최고은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따 '최고은법'이라고 불린다.

법은 예술인들의 산재보험가입과 예술인복지재단설립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법이 시행되면 기성 예술인을 비롯 많은 젊은 청년들의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정작 시행된 법은 되레 문화예술인들을 '들고 일어나게' 만들었다.

책정된 내년 정부 예산은 70억원이다. 하지만 4대보험 중에서도 산재보험만을 지원하고 예산도 문화체육관광부가 신청한 355억원의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래서야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예술인들의 노동자로서의 권리 보장을 목표로 활동 하는 단체로 내년 정식 설립을 앞두고 있는 '소셜 유니온'의 나도원 설립 공동 준비위원장(음악 평론가)도 이 법의 내용과 규모에 '불쾌하다'는 반응이다.

나 위원장은 "일명 '최고은법'은 심지어 최고은씨도 지원받을 수 없는 법"이라며 "산재보험 외에는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예산도 터무니없이 작은 규모"라고 비판했다.

그나마 책정된 예산도 예술인복지재단을 설립하고 인건비를 지급하면 거의 남는 비용도 없게 된다. 실질적으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예술노동자들에게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니 취지 자체가 훼손이 됐다는 비판이다. 한마디로 시행되었다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남는 게 없는 법'이라고 나 대표는 설명했다.

나 위원장은 복지법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관계를 맺고 있는 조직소속의 예술가 중심의 지원책이라고 주장한다. 선진국들의 경우 1인 사업자, 비정규직, 고용계약을 맺은 예술인 등 각각의 상황에 맞게 복지 제도의 틀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 지원책이 마련 돼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의 개선책에 대해 나 위원장은 "복지법은 내년에 대폭 개정되거나 다른 방법이 강구돼야 한다"며 "사업자와 산업성장정책 위주의 지원책에서 탈피해 실질적으로 예술가 개개인에게 지원이 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 위원장은 '예술인'에 대해 '노동자'임을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과 법의 재정비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술인복지법이 산재보험 이외의 보험을 포함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도 근로기준법상 예술인들 대부분이 사실상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인 스스로도 자신이 예술 '노동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자각하고 자신의 권리를 추구하기 위한 연대 형성 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